Note 018 · 운명과 과학
‘유전자에 적혀 있다’는 착각 — 유전율 50%가 운명이 아닌 이유
“성격은 유전이래.” “그건 타고난 거라 못 바꿔.” 요즘은 사주보다 유전자가 더 강력한 운명론처럼 쓰이는 것 같아요. 유전율 50%, 70% 같은 숫자를 들으면, 마치 내 절반쯤은 이미 DNA에 적혀 있어서 손댈 수 없는 영역처럼 느껴지죠. 그런데 행동유전학을 조금만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 숫자는 우리가 떠올리는 ‘운명’과는 꽤 다른 뜻이에요. 유전이 사람에게 강한 영향을 준다는 건 사실이지만, ‘영향을 준다’와 ‘정해 버린다’는 전혀 다른 말이거든요.

‘유전율’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이야기예요
가장 흔한 오해부터 풀어볼게요. 유전율(heritability)은 한 사람 안에서 유전과 환경이 50 대 50으로 작용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정확히는 한 집단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가 유전으로 얼마나 설명되는지를 가리키는 값이에요. 주어는 ‘나’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차이’인 거죠.
조금 더 와닿는 비유를 들어 볼게요. 어떤 텃밭에서 자란 토마토들의 크기가 제각각이라면, 그 차이의 상당 부분은 씨앗의 차이에서 왔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 텃밭을 통째로 척박한 땅으로 옮겨 심으면, 씨앗이 좋든 나쁘든 토마토는 다 같이 작아져요. 유전율이 높다는 건 ‘같은 밭 안에서 토마토들 사이의 차이’를 설명한다는 뜻일 뿐, 밭 자체를 바꿀 수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니에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키의 유전율은 꽤 높다고 알려져 있지만, 영양이 부족했던 시대에는 유전과 상관없이 모두가 작았고, 먹거리가 풍족해지자 한 세대 만에 평균 키가 훌쩍 자랐어요. 그러니 “성격 유전율 50%”를 “네 성격의 절반은 평생 못 바꾼다”로 읽는 건, 숫자가 한 적도 없는 말을 대신 해 주는 셈이에요.
이 오해가 퍼지는 데는 숫자가 주는 착시도 한몫해요. ‘50%’라고 하면 마치 내 안에 못 바꾸는 절반과 바꿀 수 있는 절반이 칼같이 나뉘어 있는 것 같죠. 하지만 유전과 환경은 그렇게 깔끔하게 갈라지지 않아요. 둘은 처음부터 한데 얽혀서 작동하거든요. 이게 무슨 말인지가 다음 이야기예요.
유전자는 혼자 일하지 않아요
또 하나 놓치기 쉬운 건, 유전자가 환경과 떼어 놓고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같은 유전적 소인도 어떤 환경을 만나느냐에 따라 켜지기도 하고 잠잠해지기도 해요. 이걸 유전자-환경 상호작용이라고 불러요. 더 나아가 후성유전(epigenetics) 연구는, 우리가 겪는 경험이 유전자 자체는 그대로 둔 채 그 ‘발현’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보여 줘요.
예를 들어 불안에 민감한 기질을 타고난 아이라도, 안정적인 양육과 관계 속에서 자라면 그 민감함이 섬세한 공감 능력으로 피어나기도 해요. 같은 소인이 거친 환경에서는 만성적인 불안으로, 따뜻한 환경에서는 깊은 헤아림으로 다르게 자라는 거예요.
그래서 같은 유전적 출발선을 가진 사람도 살아온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자리에 도착해요. 유전이 그린 건 흐릿한 밑그림이고, 거기에 색을 입히고 명암을 넣는 건 평생에 걸친 경험과 선택이에요. 유전은 ‘이런 쪽으로 기울기 쉽다’는 경향이지,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판결문이 아니에요.
그래서 ‘유전이냐 환경이냐’라는 질문 자체가 사실 잘못 놓인 질문이에요. 마치 ‘드럼이 노래를 만드나, 멜로디가 노래를 만드나’를 따지는 것과 비슷하죠. 둘 중 하나만으로는 음악이 되지 않아요. 우리가 누구인지는, 타고난 소인과 살아온 환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연주한 합주의 결과예요.

과학도 아직 다 모른다고 정직하게 말해요
마지막으로, 유전학 스스로가 인정하는 겸손한 사실이 있어요. 성격이나 기질에는 그것을 결정하는 단 하나의 ‘그 유전자’ 같은 건 없어요. 수천 개의 유전자가 아주 조금씩 영향을 보탤 뿐이에요. 그래서 유전 정보만으로 한 사람의 성격을 예측하는 힘은 우리 기대보다 훨씬 약해요.
게다가 쌍둥이 연구가 추정한 유전율만큼을 실제 유전자에서 찾아내려 하면, 상당 부분이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요. 학자들은 이걸 ‘빠진 유전율(missing heritability)’이라고 불러요. 유전이 강력한 빛인 건 맞지만, 그 빛이 닿지 못하는 그늘 또한 그만큼 넓다는 정직한 고백이에요.
이 겸손함이 중요한 데는 이유가 있어요. “과학이 그렇게 말했다”는 한마디는 사주의 “운명이 그렇다”는 말보다 훨씬 단단한 권위를 두르고 다가오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더 쉽게 사람을 체념하게 만들 수 있어요. 숫자의 옷을 입은 결정론일수록, 그 숫자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한 번 더 물어야 하는 이유예요. 결국 ‘유전자가 다 정한다’는 믿음은, 우리가 의심했던 사주 운명론만큼이나 단순한 오해인 셈이에요.
그러니 “타고난 거라 어쩔 수 없어”라는 말 앞에서 한 번쯤 멈춰 서도 좋아요. 유전은 내 출발선이 어떤 모양인지를 알려줄 뿐, 도착점까지 미리 정해 두지는 않아요. 그건 사주 한 장이 한 사람의 평생을 가두지 못하는 것과 꼭 닮았어요. 다음 글에서는, 이렇게 닮은 두 결정론이 정작 우리에게서 무엇을 슬그머니 빼앗아 가는지를 이야기해 볼게요.
— END OF NOTE